(이슈클립) ‘이말년’ 관련 이슈, 기사 모아 보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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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병건(1983년 12월 5일 ~ )은 이말년을 필명으로 사용하는 대한민국의 만화가, 스트리머, 방송인이다. ‘말년’은 대화명이자 호다. 드라마에서 나오는 성공한 퇴직자처럼, 젊었을 때부터 인생을 정리하며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.[1]이병건은 1983년 12월 5일에 태어났다. 본인의 학창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. “예상 외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, 활발하지 않았어요. 조용하고, 튀지 않는 성격이었어요. 물론 노트에 그림도 많이 그렸었고요. 잘 그리지는 못했지만요. 반에 한 명씩 있는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 있잖아요. 그런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던, 그런 학생이었어요.”[2] 미술대학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. 2002년 단과대 차석, 과 수석으로 건국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지만, 학사과정에 그림 그리는 과목은 사실상 없었고, 적성에 안 맞았지만 단과대 차석에게 주어지는 3년 장학금을 받기 위해, 오차범위 내에서 학점 3.5를 넘나들며 전체 6학기 중 3학기의 등록금을 면제받았다. 그 뒤 군대에 복무하여 2005년 2학기에 복학했지만 여전히 학과 공부가 재미없어 2006년 1월 휴학했다.[1]휴학 이후 1년간은 디시인사이드, 인터넷 뉴스, 유머 사이트, 야한 동영상을 보거나 친구들과 메신질 하거나 1, 2시간 습작을 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. 1년 뒤 4학년 1학기로 복학했다. 지도교수가 그를 불러 “휴학해라. 네 실력 갖고는 졸업 못한다. 미술 학원 1년쯤 다니고 복학해서 졸업 작품 내라.”고 일렀으나 “열심히 노력해서 졸업 작품전에서 통과해야만 지긋지긋한 학교를 떠날 수 있으니까.”라고 생각하여 졸업에 성공했다.[1] 4학년 2학기 때, 1년 휴학기간에 쌓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그린 작품을 처음에 노히트노런에 게재했지만, 리플이 한 개가 달리자 더 많은 리플을 받기 위해 디시인사이드 카툰-연재 갤러리에 조금씩 단편을 올렸고, 처음엔 반응이 없었지만, 《불타는 버스》편에서 갑자기 반응이 확 좋아져, 그때부터 단편들을 딱 묶어서 《이말년씨리즈》라는 제목을 붙였다.[2][3] 8회쯤 올렸을 때 야후에서 연락이 와 갑자기 데뷔했다.[1]이말년은 2009년 1월경 야후코리아 카툰세상에서 《이말년씨리즈》를 연재하기 시작했다. 당시의 이말년은 “그저 언더에서 반짝 뜬 아마추어 웹툰 작가”였으며, 유명세는 탔지만 그래도 벌이가 시원치 않아 DVD방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했다. 그의 부모는 “때려치우고 공장이나 다니라.”고 설득했지만, 1년은 더 해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한 후 운 좋게 네이버 웹툰 작가로 입성할 수 있었다.[2] 2012년 6월 카툰세상이 서비스를 종료하자 “야심찬 출발이었다. 싹수 있는 작가를 많이 발굴한 사이트 아닌가.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. 데뷔를 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은 만화였다. 야후코리아를 통해 제의를 받고 본격적으로 웹툰 작가로 일하게 되었는데, 아쉽다”고 피력했다.[4] 2012년 12월 25일의 〈본격산타만화 산타학교〉 편을 마지막으로 《이말년씨리즈》를 완결했다.[5]2013년 《이말년 서유기》를 새롭게 연재하기 시작했다.[5] 《인벤》 게임&피플 인터뷰에서, 그는 “사실은 ‘서유기’ 하면서 많이 느끼는 부분이, “왜 했을까?” 이런 거예요 … 《이말년씨리즈》는 그냥 하다가 막히면 ‘와장창!’으로 끝내면 됐는데, 이건 이어가야 되니까. 스타일에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. … 근데 미완으로 끝내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, 재미없더라도 이왕 시작한 이상 완성을 딱 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.”라며 연재의 고충을 이야기했다.[2] 2015년 초 피키캐스트의 연재 제안을 받아 《이말년 서유기》와 《이말년 수필》 두 작품을 동시 연재했으나 늘어난 작업량으로 일주일 중 쉬는 날이 없자 《이말년 수필》을 완결했다.[6]인터뷰에 따르면, 스트리머를 시작한 계기는 웹툰을 그리다가 쉬거나 사람들하고 얘기하면서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.[2] 처음에는 침착맨이라는 닉네임으로 다음팟에서 방송을 시작했지만, 시청자 폭이 넓은 쪽인 아프리카 TV로 이적했다.[2][7] 이후 트위치의 대규모 영입에 합류하여 그곳에서 방송을 시작했다.[8]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한 것과 같으니 웹툰 작업과 병행하는 데 문제는 없냐는 질문에 “이제 일이 되는 게 아닐까, 재미가 없어지지 않을까” 걱정이 된다고 했다.[2]이말년의 작품은 병맛 만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. 《한겨레》 이명석 저술업자는 이말년의 만화를 “병맛만큼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 이거였구나 하며 확인할 수 있는 방법”이라고 했으며,[10] 같은 신문의 김미영 기자는 이말년이 “병맛 만화의 대표주자로 꼽힌다”고 판단했으며, “그의 만화에선 신화·속담·영화 따위 소재가 어이없게 패러디돼 웃음을 준다”며 이것이 “이른바 병맛 만화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.”라고 분석했다.[11] 《아이즈》 취재팀장 위근우에 따르면, 이말년의 ‘기-승-전’까지 이야기를 쌓아놓은 뒤, ‘와장창’이라는 특유의 의성어와 함께 말 그대로 이야기를 무너뜨리며 황당한 결말을 만들어내는 그의 개그는 허무와 당혹 사이에서 독특한 웃음을 만들어내며, 이런 식의 변주된 와장창은 이말년의 트레이드마크다.[5] 《동아일보》 나성엽 기자는 이말년의 작업 과정을 “우선 펜을 잡고 난 뒤에 작품을 구상한다. 손 가는 대로 그림을 휘갈기고, 말풍선을 먼저 그린 다음에 대사를 채워 넣는다.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대충 그리는 만화. 좋게 말하면 1900년대 초반 영국 문학계를 풍미했던 의식의 흐름 기법.”으로 표현한다.[1] 이말년은 자신의 만화를 “소수 마니아용 만화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. 조석 작가님 만화처럼 많은 분들이 보고 재밌어할만한 만화는 아닌 거 같다.”고 자평하며 “김진태 작가님의 처럼 아기자기하거나,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만화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”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.[3]이말년의 아버지는 S식품업체를 운영하며 일명 라면땅으로 알려진 유탕처리 과자를 판매하고 있으며, 이말년의 그림과 만화를 포장지의 전면에 사용하고 있다.[12] 2011년 11월 26일 오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“내일 결혼을 합니다. 결혼준비 정말 뇌 터짐. 갑자기 뇌 빠는 사람이 생각이나네요. 야! 나는 행복하다”라는 글과 함께 웨딩 화보를 공개하여 결혼 소식을 전했다.[13] 이말년은 현재 안산시에 거주하고 있다.[2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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